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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단독] 장기 미제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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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미제사건인 '개구리 소년 사건'의 흔적을 다시 찾아보는 노력을 해보자.

 

 

 

우리나라가 이재명이라는 이상한 정치인 하나 때문에 온통 시끄럽다. 성남시장 재직 시절 저지른 여러 가지 범죄 혐의로 인해 야당 대표 이재명에 대한 국회에 체포동의안이 역사상 최초로 회부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명은 자신이 무슨 커다란 영웅적 행동이라도 한 사람처럼 낯짝을 뻔뻔하게 들고 다닌다. 그야말로 참 대단한 낯짝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국내 장기 미제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개구리 소년 사건(정식 사건명칭: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에 대해 사건 개요를 자세하게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사건 발생 개요]

 

본 사건은 1991년 3월 26일(화)에 발생했다. 화요일로 평일이었지만, 이 날은 지방자치제도가 다시 시행된 이후 처음으로 전국의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지방의원 중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를 치루는 임시공휴일이었다. 

 

당일 아침 8시경 대구시 소재 '성서국민학교'(現 대구성서초등학교) 3~6학년에 재학 중이던 우철원(6학년), 조호연(5학년), 김영규(4학년), 박찬인, 김종식, 김태룡(3학년) 등 총 6명은 조호연 학생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호연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던 청년이 아이들에게 "시끄러우니까 나가서 놀라"고 잔소리를 했다.

이에 따라 우철원 등 6명의 소년들은 분유 깡통과 막대기를 챙겨들고 인근 와룡산(현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 산37 일대)으로 이동했는데, 6명 가운데 김태룡 학생은 같이 따라 가려다가 '위험하니 너무 멀리가서 놀지 말라'라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났고, 몸 컨디션도 안 좋고 아침밥도 먹을 겸 혼자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김태룡은 아이들 중 유일하게 범행을 피하게 된 생존자가 되었다.

 

그 와중에 소년들이 와룡산으로 간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여럿이 존재하는데, 그 내용은 하단에 별도로 소개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우철원 등 5명의 소년들이 도롱뇽 알 채취를 위해 와룡산으로 이동한 이후 점심시간을 지나 저녁시간 때까지도 집으로 복귀를 하지 않자, 부모들은 18시쯤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다가 허탕을 치고 19시 50분에 경찰에 신고하였다. 경찰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보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산을 샅샅이 뒤졌으나 끝내 아이들을 찾지 못 했다.

 

사건 발생 초기 경찰에서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우철원 등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을 하였고, 금전 동냥을 위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하고 늑장 수사를 벌이는 바람에 본격적인 수사를 하지 못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사건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그 이후 이 사건이 여러 매스컴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1991년 5월 5일 노태우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군과 경찰이 총동원되어,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이 뒤졌다. 초반에는 수색 인력이 부족해 와룡산 서남쪽과 연못만 수색했는데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가 7월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산하에 수사본부가 차려져 총 25개조에 1조당 25명으로 구성됐고, 이곡동 성서파출소 옆건물에 둥지를 틀었다. 10월 24일부터 대구지방경찰청 차장이 수사본부장을 겸하면서 대구지역 군경 수천 명이 탐침봉까지 들고 와룡산 전체를 뒤졌으나 찾아내지 못했다.

대구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1996년 해체 전까지 5년 간 연인원 30만 명을 동원하여 산악수색 48회와 일제 검문검색 43회 외에 복지시설 및 종교단체 1천여 개소, 가정집 11,000세대를 각각 수색했고, 성서국민학교 졸업생 1,800명과 공단 노동자 19,000여명에게도 수소문해 제보만 570여건이나 됐지만 전부 허사로 끝났다.

 

그렇게 별다른 수사 성과도 없이 장기 미제 사건이 된 상태로 세월만 흐르던 중, 소년들이 실종된 지 11년이 지난  2002년 9월 26일 도토리를 줍기 위해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무근 씨에 의해 5명의 시신이 백골 상태로 와룡산 새방골 중턱에서 발견되었다.

 

시신 발견 신고를 받은 대구달서경찰서에서 현장 출동을 하였으나 이 곳에서도 경찰은 또 한 번 사건 수사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경찰은 현장 출동을 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현장보존도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땅을 파헤쳐 현장을 훼손시켰다. 또한, 정확한 부검도 하지 않고, 현장감식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들이 파헤쳐낸 유골만 본 상태에서, "상식적으로 봤을 때 타살 흔적은 거의 없는 거 같다. 조난을 당했고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주장하여 유족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고, 사건을 지켜보던 많은 국민들의 빈축을 샀다.

 

당시 출동한 대구달서경찰서 경찰들은 사건 현장 보존이라는 기본적인 수사 원칙도 무시한 상태로 의경들에 의해 마구 삽질과 곡괭이질을 하였고, 수습된 유골들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하여 담아놓기도 하였다. 그 당시 현장 영상이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보도되었는데, 이 꼴을 본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다. 당시 발견된 시신 중 감식반의 현장감식을 받은 시신은 단 1구에 불과했다.

결국 법의학자들의 부검 결과, 둔기로 맞거나 흉기에 찔려 타살된 것이라는 추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사망 원인조차 밝혀지지 않았고, 당연히 범인도 알 수 없었으며, 범죄 도구도 불분명해서 경찰이 여러 도구를 가지고 조사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다만 가장 유력한 범행도구는 용접 후 슬래그를 깨거나 긁어내는데 사용하는 용접망치, 일명 '깡깡이망치'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원래 육군 제50보병사단의 사격장 부지였으나, 50사단은 이미 1994년에 대구시 북구로 이전한 상태였다. 실종 당시 경찰은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을 중심으로 수색하였는데,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여 벌어진 실책이다.

이 지역은 과거 군부대 사격장과 가까이 있어서 탄피가 많이 발견되었고, 실제로 인근 어린이들이 탄피를 모으기 위해 와룡산에 자주 올랐다는 제보도 잇따라, 일각에서는 오발탄에 의한 타살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발굴 이틀 후 대구지방경찰청은 다시 수사본부를 다시 구성해 의욕을 보이는 듯했으나, 이 역시 별다른 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2003년에 대구지방경찰청은 수사본부를 해체했으며, 사실상 영구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2005년 11월 28일에 유족들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2006년 3월 26일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며, 2015년엔 경찰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 와서 범인이 잡힌다고 해도 처벌할 수는 없다.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수사가 가능한 경우도 존재하기는 하는데 이를 '공소시효 배제'라고 한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가 없어서 수사가 불가능하다. 현재까지도 범인 또는 범인을 아는 사람이 자수하지 않는 이상 범인이 붙잡힐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는 상태이며,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이춘재의 경우처럼 설령 다른 사건으로 인해 이미 체포 후 수감된 상태로 그 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종 당시 목격자들]

 

당시 이 소년들을 목격한 사람들이 여럿 존재한다.

 

목격자 중에는 4학년 김영규 학생의 친구였던 김진태 학생이 있었는데, 그 당시 소년들이 와룡산 옆 "선원지 연못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보통 못이나 저수지에 간다고 하면, 선원지에 간다는 얘기이고, 거기를 가면 늘 근처 사격장에 가서 탄피를 줍고는 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목격자 중에는 조호연 학생의 형 조무연(당시 중학교 1학년)이 있는데, 조무연은 자전거를 타고 와룡산 입구에 갔다가 우연히 우철원 등 5명의 소년들을 만났는데, "도롱뇽 알을 찾으러 간다"라는 말을 듣고 소년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목격자다.

그리고 와룡산 기슭 마을에 살면서 시내에 나가 파출부 일을 하는 김순남 아주머니가 아침 9시경 소년들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선출하는 선거 투표를 일찍 하기 위해 학교 쪽으로 내려오다가, 와룡산 쪽으로 올라가는 5명의 아이들과 지나쳤다고 하며, 그 때 소년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을까?" 등의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고 목격담을 진술했다.

또한, 우철원과 같은 반 학생이었던 김경열과 이태석이 "오전 12시쯤 아이들을 와룡산 입구에서 봤다."라고 증언했다. 이들은 점심 먹기 직전, 우철원이 아이들과 산 쪽으로 가길래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와룡산 기슭에 사는 김이수 아주머니는 "14시 무렵에 5명의 아이들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봤다"라고 증언했다.

이 외에도 같은 성서국민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은 아이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와룡산 바로 밑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함승훈은 이날 다른 무리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 형들과 떨어져 혼자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갔는데, ''그때 산 위쪽에서 10초쯤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2차례 들었다''라고 진술했다. 성인이 된 함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같이 올라갔던 형들은 듣지 못했다고 한다. 함 씨는 "이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까, 11시 30분쯤 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김종식 군의 어머니 허도선 씨와 김영규 군의 어머니 최경희 씨는 함 군이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에, 똑같이 "가슴이 오그라드는 듯한 묘한 '위기감'을 느꼈다"라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찾아 나섰다가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집에 돌아오면 야단이나 쳐야겠다'라고 생각했으나, 점심 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사건 당일인 1991년 3월 26일 대구시 서구 중리동에 위치해 있던 가축 도살장(현재의 퀸스로드 쇼핑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아이들이 버스를 같이 타는 걸 목격했다는 여성의 제보가 있었으나 경찰에 의해 묵살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라진 소년들에 대한 현상금이 많았던 탓에 허위제보들도 많았다. 경북 구미에서 소년들을 목격했다는 제보도 있었고, 부산에서 앵벌이로 커피를 팔거나 새우잡이배에 납치되었다는 제보도 있었으며, "아이들을 내가 데리고 있으니 돈을 내놓으라"고 하거나 "내가 실종된 개구리 소년 중 한 명"이라는 장난전화를 하면서 부모와 조사 중인 경찰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수사에 혼선을 주는 일들도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대에 남파 간첩을 훈련시키는 교관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북한 공작원이 남한 고교생 등을 납치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북한 공작원의 납치설도 떠돌았고, 허무맹랑한 UFO 납치설까지도 제기되었으며, 심지어는 나병 환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을 납치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 외에도 심리학자와 심령술사, 역술인들 역시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경주 왕릉 매장설, 김종식 자택 매장설, 고속도로 교각 매장설 등 온갖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사건 발생 약 10년 후인 2001년 7월에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의 한 염전에서도 제보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급파됐으나 허위로 판명난 적도 있었고, 1997년 8월에는 40대 여성이 법정에서 자신이 개구리 소년을 유인 후 암매장했다고 밝혔지만 허위진술로 판명나기도 했다.

 

더군다나 유골 발굴 하루 전인 2002년 9월 25일에는 한 남성이 "아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라면서 거짓 제보를 했는데, 유골 발견과 비슷한 시점이라 경찰은 이 남성의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수배하였고, 결국 이 남성은 경찰서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는데 "노태우 정부가 강경대와 김기설 사건 등 당시의 어수선한 시국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죽여 암매장한 공작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등 횡설수설하여 조사해보니 10여년 전 권투를 해서 돈을 벌겠다며 가출 후 머리를 다쳐 정신이상 상태에서 서울역과 명동성당 일대를 전전하던 노숙자로 밝혀졌다.

 
 

 

※ 위에서 본 것처럼 '개구리 소년 사건'은 사건 초동 수사 단계부터 시신 발견 단계에 이르기 까지 도저히 일반상식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황당한 수준으로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건 수사 수준과 기법을 갖고 있던 경찰에 범인이 잡히는 것이 오히려 기적으로 볼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 다음 3편은 이 사건의 수사와 종결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어 장기 미제 사건이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으니,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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