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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단독] 장기 미제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제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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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재명 체포동의안 방탄국회로 인해 매우 세상이 시끄러운 상황이다. 이재명이 저렇게 감옥을 가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다양한 꼼수를 사용하면서 용쓰는 모습을 보자니 참 너저분하고, 지저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사람들도 생각이 있고, 보는 눈도 있는데........ 오죽하면 자기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조차도 이재명 체포동의안 처리 방탄국회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고, 이재명 자신이 정치적 입문을 시킨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 조차도 이재명이 하루빨리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라고 기자회견까지 했을까?

 

정치인 생활을 하려면 우선적으로 솔직하고, 당당해야 하는 것이지........ 저렇게 허구헌날 입만 벌리면 거짓말을 해대고, 자기 입으로 직접 얼마 전 내뱉었던 말과 최근에 하는 말이 전혀 다른 저런 인간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저렇게 미련을 떨고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에는 도대체 저리도 사람이 없고, 인물이 없는건가?

 

얼마 후 이재명에 대한 불기소 재판들이 하나 둘씩 시작되면 어차피 방탄국회가 무의미해질 것이고, 이재명은 현실적으로 당 대표로서의 정치인 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이 뻔한데도 더불어민주당은 무슨 생각을 갖고 저러고 있는지 참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든말든 어차피 정청래, 김남국, 최강욱 등을 포함하여 이재명 추종자들이 자기들 묘자리를 스스로 파고 있는 한심스러운 상황이니, 저리도 모자라는 애덜 그러든가 말든가 하고 철없는 모지리들 이야기는 이쯤하고 넘어가야 겠다.

 

 

 

오늘 '제이슨 리 탐정사무소'에서는 기획하여 재검토 중인 《장기 미제 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시리즈 중에 '개구리 소년 사건(정식 사건명칭: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의 재검토 제4편으로 이 사건을 원초적인 시점부터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통해 단편적이고 미미한 상황들을 다시 분석하고, 이를 살펴본 후 사건 해결을 위한 새로운 단서들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장기 미제 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시리즈 7부작 중 제4~6편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럼 제4편 본론으로 들어가서 '개구리 소년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단서를 간과했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 무엇이 새롭게 보이는지 원초적으로 다시 탈탈 털어보도록 하자.

 

개구리 소년 사건은 이미 사실상 영구 미제사건으로 분류되었을 정도로 범인을 특정할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상태이다. 그렇기에 이를 해결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능성 높은 상상력을 발휘한 상태에서 합리적인 추리를 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가설들 중에 너무 황당한 내용으로 상상력을 발휘한 내용이라면 수사의 혼선 방지를 위해 배제하는 것이 옳겠지만, 어느 누구도 범행 현장을 정확히 목격했거나 CCTV 영상 등으로 촬영된 빼박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선입견 없이 오픈 마인드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며, 이를 통해 미미한 단서라도 찾아서 사건 해결을 위한 하나의 단초라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만, 이 경우 '확증 편향'의 오류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자신의 견해 또는 주장에 도움이 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취하고, 자신이 믿고 싶지 않은 정보는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성향을 말하는 '확증 편향'은 자기 중심적 사건 왜곡을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객관적이고, 증거 위주로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보려면 첫 번째로 그 당시 경찰들이 수사과정에서 무엇을 놓치고 미흡했는지 살펴보면서 나름대로 새로운 시각으로 추리를 해볼 필요가 있고, 두 번째로 각종 전문가를 포함해 일반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인 가능성과 가설을 제시한 내용까지도 그 타당성을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상당히 길어질 수밖에 없는 내용이므로 첫 번째는 이번 제4편에서, 두 번째는 다음 제5편에 다루어보기로 하자.

 

나는 이제부터 몇 가지 사소한 단서들로부터 사건 해결을 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나가 당시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추리와 문제해결에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고 계신 여러분들도 아래에 풀어가는 제 추리와 의견을 자세히 읽어주신 다음, 이를 함께 판단해주시기를 부탁드리며, 이 글이 합리적이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실 경우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사건 해결에 위한 공감대 조성이 이루어져 '개구리 소년 사건'이라는 장기 미제사건이 공소시효가 종료되었지만,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 개구리 소년과 유가족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경찰 조사가 다시 이루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새로운 관점 #1: 개구리 소년들의 리더였던 '우철원' 학생의 두개골에 외상이 집중된 이유를 살펴 보자.]

 

그 첫 번째 단서로서 개구리 소년들의 리더였던 우철원 학생의 입장과 우철원 학생의 두개골에 외상이 집중된 이유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국민들은 '개구리 소년'들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로 서로 어울려서 산으로 놀러갔던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피해자들은 모두 같은 성서국민학교(현 대구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이기는 하나, 학년은 서로 달랐다.

 

피해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철원(禹喆元): 6학년, 조호연(趙浩衍): 5학년, 김영규(金榮奎): 4학년, 박찬인(朴燦印): 3학년, 김종식(金鐘植): 3학년으로 같은 학교의 3~6학년 사이 학생들이었다.

 

당시 개구리 소년을 찾는 현상금 포스터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같은 학교를 다니는 초등학생들이고,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는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지만, 최대 세 살 차이까지 나는 학교 선배이기 때문에 그 5명 사이에는 엄연히 서열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들 5명 중 리더는 당연히 6학년인 우철원 학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성서국민학교(현 대구성서초등학교)의 선배이고, 운동도 잘 하는 동네형 우철원 학생을 나머지 소년들이 리더로서 따르는 것은 아이들 사회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철원 학생의 경우 당시 6학년이고, 나이는 13세였다. 부친 우종우 씨의 증언에 따르면, 우철원 학생은 전국 단위 육상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달리기를 아주 잘해 그대로 성장했다면 육상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회상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철원 학생이 달리기를 매우 잘 한다는 점과 소년들 중 리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실종 당일 소년들이 와룡산 도룡뇽 알을 찾으러 갈 때도 우철원 학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함께 길을 나선 것으로 볼 수 있고, 만약 다른 소년들 중 어느 누군가가 그러한 제안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우철원 학생의 동의가 없었으면 와룡산 방향으로 놀러 가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은 2002년 9월 26일 소년들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 유골 감식 과정과 경찰 수사과정에서 우철원 학생과 김종식 학생을 포함한 3명의 두개골에 외상 흔적들이 나타난 점이며, 특히 가장 나이가 많고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우철원 학생의 두개골에 25개의 외상 흔적이 더욱 집중적으로 나타난 점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경북대 법의학과 법의학자들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최소 3구의 사체에서 인위적인 외상 흔적이 나타났다고 발표를 했고, 외상 흔적이 발생한 시점은 사망 당시에 발생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아이들이 타살된 것을 의미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당시 두개골에 외상이 나타나지 않은 2명의 아이들의 경우에는 목이 졸려 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지만, 발견 당시 백골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감식하여 확인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여진다.

 

법의학자 분석 결과에 따르면, 5명의 아이들 중 김종식 학생의 좌측 팔 유골에는 둔기로 추정되는 범인의 공격을 팔을 들어 방어를 시도하다가 생긴 것으로 보이는 팔부위 골절상(방어흔)이 발견되고, 두개골 눈 부위 부근에 ㄷ자 형태의 흉기로 찔려서 발생한 구멍(공격흔)도 발견되었다.

 

지금까지의 사체 감식 상황을 살펴볼 때, 리더였던 우철원 학생이 여러 가지 흉기에 의해 가장 잔혹하게 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우철원 학생이 5명의 소년들 중 리더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저항을 했거나, 당시의 위험 상황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나름대로 자신감 있는 달리기 능력을 활용해 도망치던 중 범인들에게 붙들려 제압당하는 폭행 과정에서 생긴 외상으로 추리된다.

 

당시 상황을 합리적인 상상력으로 추리해본다면, 범인들이 어떠한 이유로 인해 개구리 소년들을 붙잡아놓고 있었을 당시에 우철원 학생이 도망을 쳤을 것이며, 범인들 중 약 2~3명 정도가 이를 뒤쫓았을 것이고, 쫓아가는 동안에 "거기 서. 너 잡히면 아주 죽는다"고 화가 나서 협박을 했을 것이며, 당황한 우철원 학생이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졌거나 산비탈이 미끄러져 넘어져 범인들에게 붙잡혔을 것이고, 뒤이어 범인들의 가차없는 폭행이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에서 우철원 학생이 저항을 했거나 소리를 크게 지르자 여러 명이 여러 가지 흉기로 가격하여 두개골에 'X'자 형태, 'ㄷ'자 형태, 'ㅁ'자 형태, 'O'자 형태의 다양한 모양의 외상 흔적이 남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  아래의 사진은 그동안 각종 방송을 통해 방영된 화면을 기초로 나름대로 분석 및 판단을 한 것이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나 경북대 법의학과 정밀감정 결과 등에 대한 자료확보가 제한되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정확하게 분석한 내용이 아님을 양해하시고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1 [자료 화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2 [자료 화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3 [자료 화면: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4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5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6 [자료 화면: MBC PD수첩]

 

이 외상의 경우에는 보기에 따라 마름모꼴처럼 보이지만, 우하단의 하얀 부분을 자세히 보면 직사각형에 가깝다.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7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8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9 [자료 화면: MBC PD수첩]

 

우철원 학생 두개골에 있는 외상 흔적들 10 [자료 화면: MBC PD수첩]

 

다른 각도에서 'O'자형 외상 흔적(두개골 반대편까지 곡괭이 같은 흉기로 찍히면서 관통된 것처럼 보인다)

 

'X'자형 외상도 형태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자료화면: 서울신문]

 

좌측과 우측의 'X'자형 외상의 형태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일한 흉기이지만, 조금 더 깊숙하게 들어갔을 때와 그렇지 않은 차이로 보인다.

 

또 다른 형태의 'X'자형 외상의 형태

 

어떤 'X'자형은 이러한 형태도 있다. 'X'자형의 범행 도구가 '버니어 캘리퍼스'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김종식 학생의 두개골에는 'ㄷ'자형 외상 흔적 존재

 

김종식 학생의 두개골에 있는 또다른 'ㄷ'자형 외상 흔적

 

통상적으로 1명이 공격을 가했다면, 손에 들고 있는 1개의 흉기로 공격하는 것이 상식이지, 여러 가지 도구를 꺼내어 돌려가면서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철원 학생에 대한 공격은 1명이 아니라 여러 명의 범인들에 의해 자행된 외상 흔적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범인들이 소년들을 살해한 이후 사체가 발견되었을 때에 대비해서 경찰 수사의 혼선을 불러 일으킬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여 사체에 추가적인 외상 흔적을 더 만들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나, 이 가능성은 집단 살해를 하는 경황이 없는 상황과 소년들의 사체들이 비교적 얇은 깊이로 매몰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시 다소 희박하다고 보여진다.   

 

 

 

[새로운 관점 #2: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한 범인들의 규모와 연령대를 추정해본다.]

 

지금까지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갈 단서는 매우 적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당시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경찰들이 당시 사소한 단서들에 대해서 크게 중시하지 않고 간과하였거나, 사건 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먼저 풀어갈 문제는 만약 범인이 개구리 소년 5명을 살해하여 암매장하였을 때 단독 범행이었을 것인지, 아니면 여러 명의 공범들이 있었을지에 대한 문제부터 풀어갈 필요가 있다.

 

이것은 비교적 쉬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식적이고 합리적으로 풀어가면 쉽게 가정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범인은 최소 2~3명, 많게는 2~5명 정도 규모로 10대 후반~20대 중반의 성인 남성들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범인들의 규모와 연령대를 추정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개구리 소년들이 어떠한 사유로 범인들에게 붙들려 있는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소년들이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주할 경우에 범인이 1명 단독이라면 아무리 나이 어린 소년들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전부 따라가 붙잡을 수 있는 인원 통제 능력이 없다. 그렇기 위해 초등학생 5명을 붙잡아 놓고 있으려면 최소한 2~3명의 사람이 필요하고, 많게는 2~5명 규모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개구리 소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은 우철원 학생으로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이었고, 키 149cm로 학교에서 육상부 전국대회에 출전했을 정도로 날래고 민첩한 학생이었다. 만약 우철원 학생이 범인 일행들로부터 순식간에 달아나려고 뛰었다면 30대 이상의 연령대 성인은 단거리 달리기 능력이나 지구력 측면에서 절대 우철원 학생을 뒤쫓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범인들은 개구리 소년들을 신체적으로 충분하게 제압할 수 있는 10대 후반~20대 성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정된다.

 

셋째, 만약 범인 일행 중 성인 여성이 끼어 있었다면, 여성 고유의 동정심과 보호 본능 때문이라도 5명을 집단 살해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하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호하게 개구리 소년들을 집단 살해하였다는 것은 범인 공범들 속에는 여성 멤버 구성원이 없이 남성들로만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들이 그 중에 리더격인 누군가의 지시 또는 서로의 합의에 따라 개구리 소년들을 집단으로 살해하면서 누군가는 망을 보고, 누군가는 다른 아이들을 살해하였으며, 누군가는 땅을 파서 암매장하고 흔적을 최대한 제거하는 역할 등을 나누어 최대한 빠르게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어떠한 배신자도 없이 이 사건에 대해 서로 발설하거나 자수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남성들만의 강한 결속력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위에 제시된 외상 흔적 사진들에서 볼 수 있듯이 사이코패스나 저지를 수 있는 수준으로 매우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도구로 살해를 한 것을 보면, 이는 범인들이 범행 당시 순간적으로 이성적인 상황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신도 아이들을 키우거나 키워본 20대 후반 이후 연령대의 사람들이라면 자기 자식들이 생각나서라도 저렇게 잔인무도한 방법으로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공범 중 누군가는 강하게 만류했을 것이며, 시신의 외상 흔적도 저렇게 지저분하지 않고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자식을 직접 키워보지 못했고, 생명의 소중함을 잘 모르며, 피해자가 느끼는 고통을 잘 알지 못하는 10대 후반~20대 중반 이내의 연령대일 가능성이 높고, 이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처벌의 두려움으로 인해 잘못을 은폐하고자 깊은 고민없이 황급하게 집단 살해 및 암매장을 결행한 후 신속히 범행장소를 이탈한 것으로 보여진다.

 

 

 

[새로운 관점 #3: 우리는 와룡산 보다는 와룡산 아래에 위치한 '선원지'라는 저수지를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경찰의 수사와 국민들의 시선은 '와룡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진술과 아이들의 행적을 볼 때 개구리 소년들이 '와룡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주변 일대를 배회하며 오전부터 오후까지 놀러다닌 것은 분명해보인다.

 

그러다보니 모든 시선은 산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을 가장 높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 외에도 경찰에서 초창기부터 소년들을 앵벌이로 데려가 활용했을거라는 판단부터 북한 무장공비나 간첩에게 산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 본드를 흡입한 동네 불량배들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 50사단 사격장에서 사격에 피탄되어 사망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암매장을 했을 가능성 등등 여러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지만, 이 대부분은 그 사건 발단의 시작을 와룡산에서부터 시작을 한다.

 

이에 대비하여 나는 '와룡산' 하단부에 위치한 '선원지'라는 작은 저수지(연못)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 곳에서부터 개구리 소년에 대한 집단 살해 사건의 발단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지금처럼 인터넷과 게임, 각종 스포츠와 문화 생활이 발달된 상황에서의 생활 여건과 상식 차원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1991년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 아이들이 놀만한 놀이 공간과 놀이 방법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주지와 학교 주변 일대에서 아이들끼리 이리저리 몰려 다니면서 재미거리를 찾는 것이 호기심 많은 아이들로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개구리 소년이 실종된 당일은 임시공휴일이었던 휴일이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공휴일에는 산이나 들로 놀러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는 3월 26일로 따스한 봄기운이 올라오는 시기로 최고 고도가 290여m에 불과한 와룡산으로 가벼운 등산을 다녔던 사람들이 제법 많이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에 소년들이 산 위에서 살해당했을 가능성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등산객들은 주로 산 능선이 이어지는 능선부 걸어서 다니기 때문에 산 능선부로부터 7~8부 높이 정도에서 발생하는 소음이라면 충분히 들을 수 있고, 언제 다른 등산객들이 지나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범행을 저지르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들을 일시적으로 붙잡아 두거나, 집단 살해를 하기는 상황상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구리 소년들이 사체로 발견된 '와룡산 새방골'의 경우에는 와룡산 3~4부 높이로 사실상 와룡산의 하단부에 해당한다. 만약 사체 발견장소에서 개구리 소년들이 참변을 당했다면 산 능선을 따라 다니는 등산객들로서는 그 소리를 듣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고 '와룡산'의 다른 장소에서 개구리 소년들을 집단 살해 후 사체 발견장소까지 옮겼을 확률은 더욱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굳이 아이들을 다른 장소에서 살해한 후 사체 발견장소까지 힘을 들여 어렵게 옮길 이유도 없고, 그러다보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기도 쉽기 때문에 상식적으로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개구리 소년들은 와룡산 다른 장소에서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사체 발견장소 또는 그 근처에서 집단 살해된 후 암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만, 개구리 소년들이 범인들을 사체 발견장소에서 맞닥뜨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와룡산 또는 그 근방에서부터 사체 발견장소까지 도망치지 못하도록 협박을 받는 가운데 강제로 끌려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방향의 와룡산 불미골 상단부 지형의 산세 1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방향의 와룡산 불미골 상단부 지형의 산세 2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 방향의 와룡산 불미골 하단부 지형의 산세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가 발견된 '와룡산 새방골' 현장의 모습(아직도 꽃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시 사체 발견 장소에서 경찰 측이 현장을 확인하고, 감식하는 모습

 

 

내 판단에는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볼 지역은 바로 '선원지'라고 불리는 와룡산 하단에 위치한 조그만 저수지, 즉 연못이다. 이곳은 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씩 찾는 곳이었기에 소년들이 실종된 공휴일에도 '선원지'로 낚시를 하러온 사람들이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개구리 소년들이 살던 마을에서 와룡산 불미골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주로 '선원지' 저수지를 지나는 코스로 이동했다고 또래 친구들은 증언했다.

 

'선원지'가 개구리 소년들 유해발굴현장까지 그리 멀지않은 거리에 위치해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선원지 일대를 수색하고 있는 모습

 

'선원지'는 작은 연못이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저수지로 보인다. 좌측 상단에 비포장도로는 차량도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내가 '선원지'라는 저수지를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에 남겨진 여러 가지 도구를 사용한 외상 흔적들을 고려할 경우, 와룡산을 찾은 등산객이나 불량배들에게 범행을 당했을 확률보다는 '선원지' 근처로 차량을 가져와 낚시를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범행을 당했을 확률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가벼운 등산을 다니는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다양한 도구들을 배낭에 휴대하지 않는다. 배낭에 갈증과 요기를 면할 수 있는 간단한 음료와 먹거리, 가벼운 자켓 정도를 챙겨서 다니게 된다. 물론 등산을 가는 곳이 험난한 산악 지형일 경우에는 지팡이 용도로 피켈을 들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와룡산은 매우 완만한 지형으로 낮은 고도의 뒷산 정도를 오르는데 에베레스트 등반하듯이 산악 장비를 챙겨서 들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다.

 

다만 요즘처럼 캠핑을 즐겨하는 시기에는 다양한 캠핑 용품들을 챙겨서 다니기 때문에 다양한 도구를 갖고 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1991년도 당시에는 와룡산 같은 뒷산에서 캠핑하는 캠핑족들은 거의 없었을 듯하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로 와룡산에서 캠핑하는 캠핑족은 거의 없을 듯하다.

 

그런데 낚시꾼들은 다르다. 낚시꾼들은 등산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장비를 갖고 다닌다. 또한, 챙겨가야 할 낚시 장비나 미끼류, 취사도구, 낚시용 텐트, 낚시용 차양 및 의자 등등을 가져갈 장비들이 제법 많기 때문에 승용차나 승합차, 소형 트럭 등으로 인원과 장비 등을 싣고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낚시용 텐트 못을 땅에 박기 위해서는 개구리 소년 유골 감식 결과 'O'자형과 'I'자형 외상 흔적의 범행도구로 지목된 목공용 망치를 포함하여 'X자형, ㄷ자형, ㅁ자형'의 외상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여러 도구 등을 가져갈 수도 있고, 범인의 직업 종류에 따라 얼마든지 삽이나 곡괭이 같은 다양한 연장들도 차량 내에 싣고 다닐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낚시터 일대에서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텐트나 차양을 쳐놓고 있는 경우는 매우 흔한 모습이다.

 

여럿이 단체로 낚시를 갈 경우에는 이렇게 텐트 한 개만 치지 않고 여러 개를 설치할 수도 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이나 동네 불량배들이 산에 올라갈 때는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에 사용된 다양한 도구류나 사체 매몰 시 필요한 삽이나 곡괭이 등의 연장들을 짊어지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산악도로가 없는 이상 산으로 차량을 몰고 들어간다는 것 역시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나 낚시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차량을 타고 낚시터에 온 뒤 각종 낚시장비를 내려 낚시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차량에는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할 때 사용된 다양한 도구류와 사체 매몰 시 필요한 삽이나 곡괭이 등의 연장들도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 범인들이 차량을 갖고 있었다면, 소년들을 집단 살해한 이후 해당 지역의 마을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은 상태로 신속하게 이탈하기에도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로 이곳 '선원지'는 개구리 소년들이 평소에도 놀이삼아 자주 찾는 장소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실종 당일 오후 4시 30분경에 '선원지' 주변에서 개구리 소년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봤다는 지역 주민 목격자도 존재하며,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되었을 당일에  '선원지'라는 연못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낚시꾼 6~7명을 보았다는 정모(당시 16세, 여)씨의 목격담이 경찰 측에 제보되었다는 사실도 존재한다.

 

또한, 이곳 '선원지'는 개구리 소년들이 사체로 발견된 장소인 '와룡산 새방골'에서도 불과 약 1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다.

 

그렇다면, 당시 경찰에서는 개구리 소년들이 오후 4시 30분경 '선원지' 저수지에서 놀고 있었다는 목격담을 왜 간과했을까? 그리고 무슨 이유로 사건 초기부터 개구리 소년들이 가출을 했다거나, 앵벌이로 활용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붙잡혀 갔을 것이라고 엉뚱한 추리를 해서 무려 11년 6개월이라는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을까?

 

물론 경찰에서는 주변지역 불량배들에 대한 수사를 포함하여 목격자 탐문과 공개수사 전환에 따른 제보 수사 등도 실시했고, 다수의 군 및 경찰 병력을 동원한 실종지역 수색을 병행하였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과론적이지만, 만약 사건 초기 경찰에서 '선원지'에서 개구리 소년들이 오후 4시 30분경 '선원지' 저수지에서 놀고 있었다는 목격담, '선원지'라는 연못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낚시꾼 6~7명을 보았다는 정모(당시 16세, 여)씨의 목격담을 주목하여 '와룡산 불미골'이 아닌 '선원지' 부근의 '와룡산 새방골' 일대까지 정밀 수색을 확대하여 실시하였더라면 군견이나 탐침에 의해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따라서, 나는 기존 경찰 수사와는 다르게 개구리 소년 사건이 '와룡산'보다는 '선원지'로부터 발단이 되어 사건이 발생되었다는 새로운 추리와 가설을 세우고, '선원지'를 주목하여 이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관점 #4: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한 동기와 과정에 대해 합리적 상상력을 발휘해 추리해보자.]

 

나는 이러한 소년들의 사체 유골 상태와 유골 발굴 장소,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 당일 오후 4시 30분경 '선원지'에서 놀고 있었으며, 당시 '선원지'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 6~7명이 낚시하는 모습을 봤다는 목격담 등을 근거로 하여 범인들의 살해 동기와 과정 등에 대한 합리적인 상상력을 발휘해 추리를 해보고자 한다.

 

당시 어떠한 원인과 동기로 인해 개구리 소년들이 누군가에게 타살을 당한 상태에서 암매장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개구리 소년 5명이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범인들에게 붙들려 있는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런 이유없이 개구리 소년들이 지나가는데 다짜고자 잔인한 방법으로 집단 살해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이유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원지'에서 낚시를 하던 10대 후반~20대 초반 6~7명을 피의자로 추정을 한 후 이들에게 개구리 소년들이 붙들려 있는 상황이었다고 가정을 한다면, 이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단체로 붙잡아 놓고 있을만한 뭔가 특별하고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를 위해서는 '선원지'라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선원지' 주변에서는 개구리 소년 사건이 발생하기 약 3년전이었던 1988년 70대 노인이 손과 발이 정교한 매듭으로 결박되어 구부린 상태로 저수지에 익사한 변사체가 발견되어 인양된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별다른 목격자도 없는 상태에서 변사 사건으로 처리된 듯하며, 1989년에는 50사단 각개전투교장에서 여성 변사체가 발견되는 사건도 있었을 정도로 '선원지' 일대는 당시 50사단 사격장을 관리하던 군인들 조차도 겁이 나서 가기를 꺼려했다는 우범지역이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70대 노인의 손과 발이 비전문가들은 풀기 어려운 수준의 정교한 매듭으로 결박된 사건의 경우에는 개구리 소년 중 1명인 김영규(4학년, 12세) 학생의 유류품 중에 상의와 하의가 각각 매듭으로 묶여져 있었다고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단서이고, 특징이 될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관심은 가져볼만 하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두 가지의 매듭 형태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그 어떠한 추정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어쨌거나, '선원지' 일대는 종종 강력사건이 발생하는 곳으로서 우범지역이라는 하나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선원지'에서 낚시를 하던 10대 후반~20대 초반 6~7명이 피의자라는 가정을 한다면, 이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붙잡아 놓았을 이유가 무엇일지 추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예시를 두 가지만 들어보도록 하겠다.

 

첫째는 '선원지'에서 낚시를 하던 10대 후반~20대 초반 6~7명이 이미 어떠한 범죄를 '선원지'에서 저지르고 있는 현장을 개구리 소년들이 목격했기 때문에 이러한 범죄 현장을 은폐하기 일단 붙잡아 놓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범행이야 워낙 다양하겠으나, 어디선가 함께 데려왔거나 현지에서 붙잡은 여성을 강간하려고 했을 경우도 있고, 마약을 투약하여 환각상태에 빠져 있었던 중이었을  수도 있으며, 어디선가 살인을 저지르고 사체를 유기하려고 했던 상황에서 개구리 소년이 이를 목격했을 수도 있는 등 다양한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둘째는  '선원지'에서 낚시를 하던 10대 후반~20대 초반 6~7명이 '선원지'에서 변사체 발견이 된 사건과 연루된 자들로서 범인은 반드시 나중에 현장을 다시 찾는다는 말처럼 이들 역시 사건 현장을 다시 찾아 확인하던 중, 개구리 소년들이 이를 목격한 것에 자격지심이 들어 일단 개구리 소년들을 붙잡아 소년들이 무엇을 목격했는지를 신변 위협을 하면서 추궁하던 상황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개구리 소년들이 범인들에게 붙들려 있고 저항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철원 학생의 경우에는 개구리 소년들의 리더로서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며, 이에 따라 용기를 내서 뭔가를 시도해보려고 했을 것이고, 자신이 가장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달리기 역시도 성인들 못지 않게 빠른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붙잡혀 있는 상황을 신속히 벗어나 현재의 위험 상황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도망쳤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른 소년들은 어리고, 달리기도 빠르지 못하기 때문에 함께 도망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철원 학생이 도망칠 때 범인들이 서 있는 거주지 방향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 반대 방향인 50사단 사격장을 지나 와룡산 새방골 방향으로 도주를 했던 것이고, 범인 중 2~3명 정도가 도망치는 우철원 학생을 뒤쫓아간 사이에 나머지는 남아있는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우철원 학생은 나름대로 달리기를 잘했기 때문에 무려 1km 가량이나 도망을 쳤지만, 결국 뒤따라온 범인들에게 '와룡산 새방골'  사체 발견장소 부근 산속에서 붙잡혔을 것이며, 이로인해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범인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던 낚시용 도구 등을 사용하여 우철원 학생을 매우 잔인하게 집중적인 공격하던 과정에서 우철원 학생이 최초로 살해당했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리된다. 이 과정에서 우철원 학생의 두개골에 가해진 여러 형태의 외상 흔적들 중 일부가 이 때 발생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철원 학생을 쫓아갔던 범인들은 이렇게 우철원 학생을 우발적으로 살해했거나 치명상을 입힌 사실로 인해 처벌받을 것을 우려하여 이에 대한 증거를 은폐 및 인멸하기 위해 공범들이 붙잡아놓고 있던 개구리 소년 중 나머지 4명을 우철원 학생이 위치한 장소로 데리고 와서 집단으로 살해하고 땅에 파뭍기로 얘기를 한 후 그 중 1~2명이 '선원지' 일대로 다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다음 나머지 공범들과 나머지 4명의 개구리 소년들을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상황에서 우철원 학생이 있는 '와룡산 새방골' 사체 발견장소 쪽으로 이동했을 것이고, 이 때 자신들이 타고온 차량에서 삽과 곡괭이 등의 연장들을 추가로 챙겨서 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추리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범인은 최소 3~6명 정도의 인원들이 있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범인이 최소 3~6명 정도의 인원이었다는 가정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초등학생 5명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통제하기 위해서는 성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 3~4명 이상의 인원이 있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더군다나 우철원 학생의 두개골에는 여러 형태의 외상이 존재하는데 특히 외상 부위가 'X'자 형태의 도구, 'ㄷ'자 형태의 도구, 'O'자 형태의 도구 등의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사용하여 공격을 하였는데 이는 범인이 1명 단독으로 공격할 경우 도구를 이리저리 바꾸어 가면서 공격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범인은 다수였을 가능성이 높다.    

범인들의 개구리 소년 집단 살해에 대한 동기도 우철원 학생을 우발적이지만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거나 치명상을 입혔을 경우라면, 이에 대한 사후 처리와 처벌 등을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4명의 학생들까지도 살해하고 증거를 인멸하자는 식으로 의견이 모아졌을 것이다.

 

어차피 우철원 학생을 직접 공격하지 않은 공범들도 사실상 이미 범행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상태였기 때문에 발을 뺄 수 없었을 것이고, 공범으로 처벌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므로 자신들이 엄청난 사건에 휘말릴 것이 두려워서라도 이 사건의 현장 목격자들인 나머지 개구리 소년 4명을 살려둘 수는 없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렇게 개구리 소년들을 집단 살해하기로 결론을 낸 범인들은 나머지 4명의 소년들을 위협하여 우철원 학생을 살해한 장소로 강제로 끌고 갔을 것이며,  끌려가는 소년들은 오금이 저릴 정도로 겁을 먹은 공황 상태였고 성인인 범인들에게 도저히 항거하거나 도망칠 수 없다는 자포자기 상태로 마지못해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당연히 범인들의 위협으로 인해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함부로 고함을 칠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과거 군대와 군대 간 전쟁이 벌어졌을 때 상대방 장수의 목을 누가 먼저 베느냐에 그 승패가 갈렸던 것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그 조직에서 리더가 사라지거나 무력화되었을 때 그 조직원들은 제대로 된 판단이나 대응을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년들의 리더인 우철원 학생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나머지 4명의 소년들은 범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순종적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추리한 사항은 개구리 소년 5명의 리더인 우철원 학생에 대한 집중적인 공격이 이루어진 원인과 과정, 개구리 소년들이 자신들의 집 방향이 아닌 '와룡산 새방골' 사체 발견지점까지 이동하게 된 경위, 우철원 학생을 포함한 나머지 학생들에게 가해진 외상 흔적들, 실종 당일 오후 4시 30분경 '선원지' 일대에서 목격된 개구리 소년들의 행적, '선원지' 일대에서 10대 후반~20대 초반의 6~7명이 낚시를 하고 있었던 목격담 등을 종합하여 가능한 합리적 추론 과정을 통해 추정해본 것이다.

 

만약 내 추리가 맞거나, 유사하게 상황 전개가 되었다면, 나는 개구리 소년들의 당시 행적과 살해된 동기, 과정 등이 어느 정도 납득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관점 #5: 사체 발견 이후 개구리 소년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 경찰 측의 황당스러운 오판]

 

사건 발생 11년 6개월만이었던 2002년 9월 26일 개구리 소년 사체 발견 신고를 받은 경찰에서는 당시 개구리 소년 5명의 사체가 발견된 이후 법의학적 분석과 과학수사 결과가 발표되기 전 매우 성급하게  "소년들이 길을 잃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산 속에서 서로 모여 있다가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라고 세 살 짜리 어린이도 이해하지 못할 만한 상식 밖의 주장과 궤변을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성급한 경찰의 발표 결과는 그 이후 경북대 법의학과 법의학자들의 분석과 발표에 의해 인위적인 도구로 타살된 후 암매장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경찰의 주장은 무력화되었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들의 수사 수준이 얼마나 황당하고 엉성했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발견된 사체 두개골에서 여러 형태의 외상 흔적이 발견되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전혀 생뚱맞고 말도 안 되는 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위적인 도구로 발생한 외상 흔적과 자연스럽게 오랜 기간이 지나면서 빗물과 계곡물에 의해 돌이 굴러와 유골에 부딪히면서 생긴 외상 흔적 조차도 제대로 분간하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리도 황당한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지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에서 발견된 다수의 외상 흔적이라는 엄청난 단서가 있음에도 아직까지도 범행에 사용된 도구나 암매장 시 사용한 도구, 범행이 이루어진 장소와 범행 과정, 범인들의 숫자와 연령대, 범인들의 직업 등등에 대한 합리적인 추리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사체 발견 후 경찰 측에서 주장했던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수사 결과를 한 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실종사건이 발생되었던 날 당시에도 최초 사건을 접수한 경찰에서는 소년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판단하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전등과 횃불을 들고 산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끝내 소년들을 찾지 못 했다.

 

당시 경찰과 소년들 가족,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늦은 심야 시간까지 큰 소리로 소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다녔기 때문에 소년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불빛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심야 시간의 산 속에서는 동물들이 걸으면서 낙엽을 밟아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하더라도 계곡 저 편까지도 생생하게 들리고, 사람이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는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린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여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찾는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황당한 가정에 불과하다.

 

어떻게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무서운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내면서 있었을까? 만약 그 아이들이 멀쩡하게 생존한 상태에서 서로 모여서 있었을 경우라면 당연히 본능적으로도 "사람 살려요. 도와 주세요.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외쳤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아닐까?

 

더 웃기는 것은 만약 경찰의 추정대로 아이들이 시신으로 발견된 그 위치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면, 땅 속에 매몰된 것도 아니라 그대로 지상 위에 노출된 상태로 있어야 했을 것이고, 그 이후 와룡산을 찾았던 수많은 등산객이나 나물 채취, 도토리나 밤을 줍는 사람들에게 무려 11년 6개월이라는 기간 중 어떻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이들이 사라진 3월부터 5월 사이 기간이면 저체온증으로 지상에 노출되어 사망한 아이들이 가을처럼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덮여져 있을 수 있는 시기도 전혀 아니고, 겨울처럼 눈이 쌓여져 발견할 수 없었던 시기도 전혀 아닌 완연한 봄철이었기 때문에 지상에 노출된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총동원된 군과 경찰 역시도 아이들을 찾겠다는 사명감과 4200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포상금으로 인해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군견과 탐침봉을 사용하여 와룡산 일대를 찾아다녔고, 당시 민간인들과 자원 봉사자, 등산객들도 와룡산 일대를 많이 수색하고 찾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색 인원들이 눈 뜬 봉사들도 아니고 군견들이 후각이 마비된 상태도 아니었음에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여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5명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을 뛰어 넘어 그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은 확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경찰에서는 목격자 진술에 따라 '와룡산 불미골' 위주로 수색을 진행했고, '와룡산 새방골' 지역은 수색지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역시 연간 35만 명이라는 지상 최대의 수색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한 군과 경찰의 수색작전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얘기에 불과하다.

 

만약 '와룡산 불미골' 위주 수색에서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당연히 수색 지역을 와룡산 주변 전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계획하고 시행하지 못한 당시 경찰의 무능력함과 안일함에 대해서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군과 경찰 수색 병력들이 공식적으로는 '와룡산 불미골' 일대에 대한 수색에 집중했었기 때문에 개구리 소년들이 사체로 발견된 '와룡산 새방골' 지역은 수색지역에서 벗어나 개구리 소년의 시신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 역시도 상식에 어긋나는 발표가 아닐 수 없다.   

 

앞서 얘기했듯이 당시 4200만 원이라는 꽤 높은 포상금이 걸렸었기 때문에 민간인, 자원봉사자, 등산객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와룡산 일대 전체를 뒤졌었고, 산나물 채취나 도토리, 밤 등을 줍기 위해 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만약 경찰의 주장대로 소년들이 노천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상태라면 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가 없다.

 

이를 토대로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 발견 이후 경찰 측에서 "소년들이 길을 잃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산 속에서 서로 모여 있다가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발표한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헛발질이고, 오히려 경찰 수사의 신뢰성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아마츄어 수준에 가까운 최악의 판단과 추리 결과로 보여진다.

 

 

 

오늘은 《장기 미제 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시리즈 7부작 중 제4편으로 '개구리 소년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어떠한 단서를 간과했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면 무엇이 새롭게 보이는지 원초적으로 살펴보고, 몇 가지 사소한 단서들로부터 사건 해결을 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풀어나가 당시 상황에 대한 합리적인 추리와 문제해결에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해보았다.

 

다음 제5편에서는 각종 전문가를 포함해 일반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인 가능성과 가설을 제시한 내용까지도 그 타당성을 재검토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어떤 가설이 합리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개구리 소년 사건'에 대한 장기 미제사건 재수사가 이루어질 경우 어떤 가설과 추론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제시된 살해 도구에 대한 내 개인적 분석과 판단도 제시해볼까 한다.

 

지금까지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관심 많이 가져주시길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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