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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단독] 장기 미제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제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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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제4편까지 《장기 미제 사건 추적 1탄: '개구리 소년 사건'의 재검토》 시리즈 중에 '개구리 소년 사건(정식 사건명칭: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의 개요부터 살펴본 후 이 사건을 원초적인 시점부터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통해 단편적이고 미미한 상황들을 다시 분석하고 이를 살펴본 후, '제이슨 리 탐정사무소'의 시각으로 사건 해결을 위한 새로운 단서들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찾아보는 시간을 가져봤다.

 

이를 통해 그동안 와룡산에 집중되어 있던 시각을 '선원지'라는 와룡산 하단부 근처에 있는 작은 저수지와 그 곳에서 낚시를 하던 10대 후반~20대 중반의 6~7명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음을 문제 제기한 바 있다. 또한, 범행에 사용되었던 여러 도구들이 범인의 직업적 특성에 따른 차량 적재 가능성과 낚시를 위해 차량에 적재되어 범행 현장까지 운반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개구리 소년'들이 무슨 이유로 집단 살해 및 암매장 되는 상황을 맞이 했는지에 대해서도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거쳐 추리해봤다.  

 

오늘은 제5편으로 각종 전문가를 포함해 일반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합리적인 가능성과 가설을 제시한 내용까지도 그 타당성을 재검토해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어떤 가설이 합리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고 앞으로 '개구리 소년 사건'에 대한 장기 미제사건 재수사가 이루어질 경우 어떤 가설과 추론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지금까지 제시된 살해 도구에 대한 내 개인적 분석과 판단도 제시해볼까 한다.

 

☞ 제5편의 글을 보시는 분들은 가능한 심약한 분들이나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가급적 읽지 마시기를 적극 권유해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개구리 소년 사건'과 관련하여 각종 가설로 제시된 내용들의 타당성을 재검토해보기로 하자. 수많은 가설 중 가장 대표적인 6개의 가설에 대해 재검토해보기로 하겠다.

 

 

첫째, 개구리 소년들이 가출을 했다거나, 앵벌이로 활용되기 위해 다른 곳으로 붙잡혀 갔을 것이라는 추리 [경찰 측이 사건 초기 수사과정에서 내세웠던 가설이다.]

 

이 가설은 이미 제1편~4편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고 사건 초기부터 수사 방향을 엉뚱한 곳으로 지향시켜서 무려 11년 6개월이라는 허비하게 만들고, 수많은 수사 인력들을 분산시킨 최악의 사건 추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이 가설에는 합리성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건 초기부터 '개구리 소년'들은 '도롱뇽 알'을 채집하기 위해 와룡산 쪽으로 향했음을 동네에서 같이 놀다가 헤어진 다른 소년(김태룡, 성서초등학교 3학년)이 진술했다.

 

또한, 여러 목격자들도 '개구리 소년'들이 오전시간대부터 오후 4시 30분경까지 와룡산과 와룡산 부근 '선원지' 일대에서 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더군다나 '개구리 소년'들은 자라 온 가정 환경과 집안 형편도 모두 다르고, 연령대도 모두 다른 소년들이었기 때문에 가출을 해야 할 이유와 목적, 당시 상황들도 전혀 일치되지 않았고, 당시 상황 역시도 가출을 생각하고 있는 소년들의 행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범인들이 '개구리 소년'들을 납치해서 앵벌이로 활용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이들을 납치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이 승합차 이상의 차량을 준비해서 마을 깊숙한 지역까지 들어가 소년들을 납치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소리를 지를 경우 여러 사람들에게 노출될 가능성, 그에 따라 차량번호와 차종이 노출될 가능성, 소년들 중 일부가 도주할 우려 때문에 단체로 납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한계가 있다는 점을 간과한 매우 무리하고 비합리적인 추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앵벌이 왕초들이 가출 청소년들을 앵벌이로 활용하는 통상적인 방법과도 너무 다르다. 앵벌이 일당들이 앵벌이를 할 어린 청소년이 필요하다면 먹고 잘 곳이 없어 배회하는 가출 청소년들도 그 당시 역전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무리하여 변두리 마을 일대에서 소년들을 납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소설에 불과하다.

 

이러한 황당한 추론을 하고, 그것이 일리있다고 생각하여 11년 6개월간 엉뚱하게 허송세월을 보낸 경찰들의 수사 능력과 판단력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건 발생 초기 경찰에서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우철원 등 5명의 소년들이 가정불화로 인해 가출을 하였고, 금전 동냥을 위한 앵벌이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엉뚱한 수사 방향을 정하는 우를 범하고 늑장 수사를 벌이는 바람에 본격적인 수사를 하지 못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하게 되었고, 사건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미궁으로 빠지게 되는 원인을 스스로 만들었다.

 

이는 결국 범인들을 찾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허비한 결과로 나타났고, 유족들에게 혹시나 하는 희망고문을 오랫동안 하도록 만든 심각한 과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출이나 앵벌이로 활용되었을 것을 추정하여 '개구리 소년'들이 몇 년 후 제법 성장했을 것을 추정하여 배포된 포스터 모습]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주자는 가족들과 자원봉사 후원회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하는 모습 1]

  

['개구리 소년'들을 찾아주자는 가족들과 자원봉사 후원회들이 전국을 다니면서 전단지를 돌리며 홍보하는 모습 2]

 

이러한 황당한 경찰 측의 사건 추리와 수사 방향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수많은 목격담과 허위 제보 등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수사 인력들이 엉뚱한 곳에 집중하게 되는 오류와 시행착오를 겪게 만들었다.

 

결국 2002년 9월 26일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와룡산 새방골에서 발견되면서 이러한 경찰들의 가설과 수사 방향이 터무니 없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되게 되었다. 

 

 

 

둘째, '개구리 소년'들이 길을 잃고 헤메다가 저체온증으로 자연사했다는 추리 [경찰 측이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를 발견한 이후 수사과정에서 내세웠던 가설이다.]

 

이 가설은 일선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고, 오랜 수사 경험과 검거 사례를 갖고 있는 경찰에서 이러한 내용으로 공식 발표를 했다는 점에서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는 추리라고 볼 수 있다.

 

실종사건이 발생되었던 날 당시에도 최초 사건을 접수한 경찰에서는 소년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판단하고, 부모들과 함께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전등과 횃불을 들고 산을 이리저리 뒤졌으나 끝내 소년들을 찾지 못 했다.

 

당시 경찰과 소년들 가족,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늦은 심야 시간까지 큰 소리로 소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 다녔기 때문에 소년들이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불빛을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심야 시간의 산 속에서는 동물들이 걸으면서 낙엽을 밟아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하더라도 계곡 저 편까지도 생생하게 들리고, 사람이 고함을 지르는 목소리는 몇 백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들린다.

 

그런데 아이들이 모여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찾는 고함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황당한 가정에 불과하다.

 

어떻게 아이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들이 무서운 어둠 속에서 아무 소리도 안 내면서 있었을까? 만약 그 아이들이 멀쩡하게 생존한 상태에서 서로 모여서 있었을 경우라면 당연히 본능적으로도 "사람 살려요. 도와 주세요.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외쳤을 것이라는 것이 상식아닐까?

 

더 웃기는 것은 만약 경찰의 추정대로 아이들이 시신으로 발견된 그 위치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면, 땅 속에 매몰된 것도 아니라 그대로 지상 위에 노출된 상태로 있어야 했을 것이고, 그 이후 와룡산을 찾았던 수많은 등산객이나 나물 채취, 도토리나 밤을 줍는 사람들에게 무려 11년 6개월이라는 기간 중 어떻게 발견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는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이들이 사라진 3월부터 5월 사이 기간이면 저체온증으로 지상에 노출되어 사망한 아이들이 가을처럼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덮여져 있을 수 있는 시기도 전혀 아니고, 겨울처럼 눈이 쌓여져 발견할 수 없었던 시기도 전혀 아닌 완연한 봄철이었기 때문에 지상에 노출된 상태로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총동원된 군과 경찰 역시도 아이들을 찾겠다는 사명감과 4200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포상금으로 인해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군견과 탐침봉을 사용하여 와룡산 일대를 찾아다녔고, 당시 민간인들과 자원 봉사자, 등산객들도 와룡산 일대를 많이 수색하고 찾아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색 인원들이 눈 뜬 봉사들도 아니고 군견들이 후각이 마비된 상태도 아니었음에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하여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5명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을 뛰어 넘어 그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은 확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경찰에서는 목격자 진술에 따라 '와룡산 불미골' 위주로 수색을 진행했고, '와룡산 새방골' 지역은 수색지역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역시 연간 35만 명이라는 지상 최대의 수색 병력을 투입하여 수색한 군과 경찰의 수색작전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는 얘기에 불과하다.

 

만약 '와룡산 불미골' 위주 수색에서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면, 당연히 수색 지역을 와룡산 주변 전 지역으로 확대하는 것이 당연했음에도 이를 제대로 계획하고 시행하지 못한 당시 경찰의 무능력함과 안일함에 대해서는 지적을 피할 길이 없다.

 

사람도 동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귀소본능(동물이 서식장소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경우 다시 되돌아 오는 성질)'을 갖고 있다. 우리가 만취가 되어 인사불성이 되고, 기억의 필름이 꺼진 상황에서도 기가 막히게 집까지 찾아오는 귀소 본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개구리 소년 5명이 올라간 와룡산은 그리 산이 높지도 않고 험준한 지형이 아니며, 이곳은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자주 다녀본 곳이기 때문에 그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집까지 찾아올만한 방향 감각을 충분히 갖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집에서 어른들이 걱정할 것이 뻔하고 늦게 들어오면 어른들에게 혼날 수 있는 상황인데, 아이들이 온 산이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산을 내려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비이성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 중 어느 누가 빨리 어두워지기 전까지 산을 내려가야 한다고 얘기한 사람이 없었을까? 그럴 가능성이 더 없는 가정이 아닐 수 없다.

 

개구리 소년 사체가 유골 상태로 발견된 이후 경찰에서는 소년들의 사체 유골들이 한군데에 엉켜서 뭉쳐 있는 점, 현장에 구덩이가 없었다는 점을 들어 당시 추운 날씨에 소년들이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고 과학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발표했다.

 

당시 4200만 원이라는 꽤 높은 포상금이 걸렸었기 때문에 민간인, 자원봉사자, 등산객들도 많은 관심을 갖고 와룡산 일대 전체를 뒤졌었고, 산나물 채취나 도토리, 밤 등을 줍기 위해 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만약 경찰의 주장대로 소년들이 노천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한 상태라면 이를 발견하지 못했을 수가 없다.

 

이를 토대로 개구리 소년들의 사체 발견 이후 경찰 측에서 "소년들이 길을 잃은 상태에서 날이 어두워져 산 속에서 서로 모여 있다가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발표한 것은 그야말로 완벽한 헛발질이고, 오히려 경찰 수사의 신뢰성을 바닥으로 끌어내린 아마츄어 수준에 가까운 최악의 판단과 추리 결과로 보여진다.

 

이러한 경찰 측의 황당한 가설 역시도 결국 경북대학교 법의학과 법의학자들의 유골 정밀 분석 결과(우철원, 김종식, 김영규 등 3명의 유골에 외상 흔적이 발견되어 타살된 살해 사건으로 결론)가 발표되면서 경찰들의 발표 내용이 기막히게 어처구니 없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되게 되었다. 

 

경북대 법의학과 법의학팀에서 정밀 분석 결과를 발표할 당시 유족들이 찾아와 이를 확인하는 장면

 

정밀 감식 결과

 

경북대 법의학과 정밀감식결과 발표에 따라 경찰에서는 본 사건을 '집단 살해 및 암매장 사건'으로 전환하여 수사를 다시 시작했다.

 

 

 

셋째, 북한에서 남파된 무장공비나 간첩에게 산에서 살해당했다는 가설

 

차라리 이 가설이 경찰 측에서 추리하고 판단한 첫째와 둘째 가설보다 훨씬 더 나은 추론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타당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된다.

 

북한에서 남파하는 '무장공비'들은 주로 단기적으로 군사 정찰이나 테러, 요인 암살 및 납치, 고정간첩의 안전한 침투와 복귀를 위한 안내조 역할 수행 등을 목적으로 침투하게 되며, '간첩'이라 함은 장기적으로 암약하는 고정간첩이거나 단기적으로는 고정간첩 또는 포섭 대상자 접선, 간첩장비 또는 공작자금 등을 매설할 드보크 설치 등을 목적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북한 무장공비 또는 간첩설'의 긍정적인 면을 우선 살펴보자.

 

(1) '개구리 소년 사건'이 발생된 대구 일대에는 군사적 요충지(대구 K-2 비행장, 육군 제2군사령부[現 제2작전사령부], 주한미군 부대들[대구시 캠프 워커, 캠프 핸리, 경북 칠곡군 캠프 캐럴], 육군 제50보병사단 등등)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기 때문에 '무장공비'들의 단기적 군사 정찰 목표에는 부합된다고 볼 수 있다.

 

(2) 북한의 무장공비들의 침투 전술 상 통상적으로 3인조 또는 그 이상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정도 인원이면 '개구리 소년'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잔인하게 살해한 수법 역시도 부합된닥고 볼 수 있다. 

 

(3) 장기 암약을 위해 침투한 '간첩'의 경우에는 단독으로 다니는 것이 기본이고, 경우에 따라 부부 등으로 가장하여 2인조가 다니는 경우도 있다.  와룡산 같은 장소는 도심지에서 가까운 야산이기 때문에 이런 곳 역시 '드보크' 설치 장소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북한 무장공비 또는 간첩설'의 부정적인 면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1) 북한 무장공비들이 단기 군사정찰을 목적으로 침투하였다면 은거지인 '비트(비밀 아지트)'를 설치할 장소로 매우 부적합한 장소이다. 와룡산은 등산객이나 산나물 채취를 위해 민간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낮은 산으로서 '비트' 굴설 시 소음 발생 및 은거 시 노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부적합하다. 와룡산은 산 주위가 모두 평지이고 마을들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어서 무장공비들이 침투 및 퇴출하기에도 매우 부적합한 지역이다. 

 

(2) 북한 무장공비들이 단기 군사정찰을 목적으로 침투했을 경우 와룡산은 정상이 해발고도 299.7m에 불과하고 잡목이 길게 자라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을 쌍안경 등으로 감제 관측하거나 망원렌즈 부착 카메라로 시설 촬영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지역이다. 더군다나 와룡산 부근에는 북한 입장에서 관심을 가질만한 군사기지나 주요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군사기지나 주요 시설이 위치한 인근 지역의 감시 정찰이 가능한 높은 산악 지형에 위치하는 것이 북한군 특수부대 전술에 부합된다.

 

(3) 간첩의 경우에는 와룡산을 찾을만한 이유가 있다면 드보크 방문 가능성은 높은 편이나, 고정간첩 접선을 위해 방문했을 가능성은 조금 떨어져 보인다. 그 당시나 지금 간첩들은 굳이 고정간첩 접선을 힘들게 산꼭대기에서 어설픈 분위기로 만나지 않는다. 도심 호텔 커피숍을 포함해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않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유사 시 신속히 퇴출할 수 있는 장소에서 접선하는 것이 기본이다.

 

(4) 만약 간첩이 '드보크' 방문을 해서 '드보크' 내 '간첩장비' 또는 '공작금'을 매설하거나, 그 내용물을 인수하려고 하던 장면을 우연히 '개구리 소년'들이 목격하였을 경우라면 '개구리 소년'들을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상 단독으로 움직이는 간첩의 특성 상 '개구리 소년' 5명이 도주할 경우 이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이고, 간첩은 민간인 복장으로 다니기 때문에 간단한 산행 장비를 챙겼을텐데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에 남겨진 여러 가지 도구들을 챙겨서 다닐만한 간첩은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 따라서 결론적으로 '북한 무장공비 또는 간첩'에 의한 개구리 소년 살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넷째, 본드를 흡입한 동네 불량배들 또는 근처 공업고등학교 불량 학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가설

 

과거의 시점이나 요즘이나 동네 불량배나 불량 학생들의 놀이터는 유흥지역 일대이다. 그들이 힘없는 학생들을 삥뜯는 장소들도 주로 돈을 가지고 다니는 유흥가나 주택가, 학교 주변의 한적한 뒷골목이다. 다소 대담한 불량배들의 경우에는 유흥가 큰 길에서 힘없는 학생들을 둘러싸고 위협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삥을 뜯을 대상을 위협하여 조용한 뒷골목 같은 곳으로 끌고간 후 거기에서 돈을 뺏는 경우가 전통적인 수법이다.

 

굳이 힘들게 산 속을 헤메고 다니면서 힘 없는 사람들을 찾아 마치 산적처럼 삥 뜯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산이나 들로 놀러다니는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불량배들이 유흥비로 쓰거나 담뱃값이라도 쓸만한 돈을 갖고 있을 확률이 거의 0%에 가깝다. 따라서 아무리 동네 불량배들이라고 해도 왠만해서는 그런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괜히 같은 동네에서 동네 아이들 건드렸다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어 잘못하면 오히려 더 큰 화를 입고 마을이나 학교에서 쫓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는 다른 지역에서 그러한 행위들을 하는 것이 상식이다.

 

더군다나 동네 불량배나 근처 공업고등학교 불량 학생들이 힘들게 땀 흘리며 산에 올라가 본드를 흡입하는 경우는 지극히 적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불량배들을 또다른 말로 '불한당(不汗黨)'이라고도 부르는데,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즉, 쉽고 편한 상태에서 즐기는 것을 추구하지, 어렵고 힘드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 베짱이 같은 놀새들이라는 뜻이다.

 

과연 그런 자들이 임시 공휴일이었던 날에 힘겹게 산을 올라가 본드를 불어 환각상태에 빠졌을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농촌 지역에는 평지에도 빈 집들이 많아 다른 사람들 눈을 피해 본드를 불어댈 장소들이 허다한데, 무엇하러 힘들게 산속에 올라가서 본드를 불겠나?

 

더군다나 본드를 불어대는 불량배들이 무슨 이유로 여러 가지 살해 도구를 힘들게 들고 산에 올라갈 이유가 무엇이 있을 것인가?  

 

불과 4년 전이었던 2019년에 '개구리 소년 사건'과 관련하여 와룡산 근처에 위치한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불량 학생들이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여 살해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 적이 있다.

 

'버니어 캘리퍼스'

 

또다른 '버니어 캘리퍼스'의 형태

 

 

'버니어 캘리퍼스'라는 도구를 범행 도구로 특정한 것과 범인들이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할 수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불량 학생들로 특정한 것은 그동안 수면 아래로 잠들어 있던 '개구리 소년 사건'을 새롭게 수면 위로 부상시킨 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개구리 소년 사건'의 유골에서 나온 외상 흔적들이 '버니어 캘리퍼스'를 내리친 자국과는 그 형태가 유사하기는 하나, 여러 다양한 도구로 발생한 상이한 흔적들도 많이 나타났다는 점이 경찰에 의해 밝혀졌다.

 

'버니어 캘리퍼스'로 타격한 실험 상흔과 '실제 상처 모양'을 비교한 모습으로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이다.

 

 

 

 

 

 

또한, 당시 근처 공업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들 여러 사람의 증언에 의해 당시 해당 공업고등학교에는 '버니어 캘리퍼스'를 사용하는 '기계과'가 아직 생기지 않았고, 전자계열과와 화공과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당시 학교를 다니던 어느 누구도 '버니어 캘리퍼스'를 휴대하거나 필요로 하는 학생이 없었다는 증언이 나온 바 있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버니어 캘리퍼스'처럼 'X'자 흔적을 만들 수 있는 도구류는 여러 종류가 있다. 지금부터 범행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여러 도구류를 소개한다.

 

 

좌측 사진의  'X' 자 형태로 발생한 외상 흔적은 '버니어 캘리퍼스'보다는 오히려 '니퍼' 앞부분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사진 우측 상흔처럼 주변까지 금이 가도록 파워풀하게 공격을 가하려면 '버니어 캘리퍼스'보다는 '니퍼'가 더 적합했을 것이다.

 

좌측과 우측의 'X'자 상흔의 크기와 깊이가 다른 것은 더 세게 내리쳤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일 뿐 동일한 도구로 볼 수 있다.

 

어떤 'X'자 상흔은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박혀서 뼈가 말려 들어갔음을 알 수 있다.
낚시줄 절단할 때 사용하거나, 전선이나 철사를 절단할 때도 사용하는 '니퍼'이다. 앞부분을 보면 'X'자 상흔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니퍼'의 측면부 모습

 

 

또다른 형태의 '니퍼' 모습으로 앞부분을 보면 충분히 'X'자 형태의 외상 흔적이 나올 수 있다.

 

'프라이어 렌치' 앞 주둥이 부분도 'X'자형 외상 흔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

 

 

 

두개골에 남겨진 외상 흔적 중에는 'ㅁ'자 형태와 'ㄷ'자 형태, 'ㅣ'자 형태도 있는데, 이러한 상처를 낼 수 있는 도구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아래에 소개해본다.

 

 

 

낚시용 바늘과 봉추, 봉돌 등을 달 때 사용하는 '낚시용 프라이어'의 앞부분 모습을 보면 얼마든지 'ㅁ'자와 'ㄷ'자를 구현할 수 있다.

 

'몽키 스패너' 상단부의 밑쪽 각진 곳으로 내리칠 경우에도  'ㅁ'자와 'ㄷ'자를 구현할 수 있다.

 

소형 곡괭이는 'ㅣ'자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왼쪽 상단 사진의 'ㅁ'자 상흔과 'l'자 상흔

 

'ㄷ'자 상흔

 

'ㅁ'자 상흔

 

'O'자형 상흔과 '마름모꼴' 상흔도 있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경찰에서 살해도구로 추정한 '목공망치'로 시연을 해보고 있다.

 

'대형 곡괭이'는 'O'형과 '마름모형' 외상흔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사진의 관통된 'O'형 외상흔은 주변뼈까지 함몰된 것을 볼 때 확인 살해 차원에서 '대형 곡괭이'로 내리쳐 관통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에 남겨진 외상 흔적들을 볼 때 이러한 도구류를 평상 시 휴대하고 다니는 불량배나 불량 학생들은 거의 존재하기 어렵다는 것이 상식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이러 저러한 이유로 네 번째 가설인 '본드를 흡입한 동네 불량배들 또는 근처 공업고등학교 불량 학생들에게 살해당했다는 가설' 역시도 가능성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와룡산 하단에 위치한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유탄에 의해 살해당한 후 군부대에서 이를 은폐하였다는 가설

 

'개구리 소년'들을 포함해 그 지역 일대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자주 찾았던 놀이장소 중 하나가 바로 제50보병사단의 사격장 일대이다. 그 곳에서 어린 청소년들이 사격장 주변에서 군인들이 사격 후 분실되어 찾지 못한 탄피를 줍거나, 피탄지 부근에서 탄두를 주워 고철로 팔면 적은 용돈이라도 만들 수 있는 재미 때문에 사격장 일대에서 이런 것들을 재미삼아 주웠다고 한다.

 

특히, '개구리 소년'들의 시신 유골이 발견된 이후 그 부근에서 우유팩에 든 탄두 30여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개구리 소년'들이 사격장에서 탄두를 수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개구리 소년'들이 제50사단 사격장에서 탄피와 탄두를 줍기 위해 돌아다녔던 날은 임시공휴일로 군인들도 휴식일이기 때문에 사격이 이루어진 날이 아니다. 이는 제50사단에서 이미 확인된 사항이며, 임시공휴일까지 사격을 하는 경우는 거의 0%에 가깝다. 

 

그 이유는 사격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안전통제관 / 사격통제관 / 탄약분배 및 회수 담당관 / 사격전 PRI 교육 통제관' 등이 장교 및 부사관 등 간부급으로 최소 5~7명이 필요하다. 휴일날에 사격을 위해 출근할 간부도 없을 뿐더러 교탄 분배와 회수를 위해 탄약고로 출근할 탄약관도 없다. 당직사령이나 당직사관이 사격을 시키는 경우도 절대 없다. 더군다나 사격장을 통제하는 상급부대에서 사격장을 사용하도록 허가하지도 않는다. 이런 가설을 세우는 사람은 군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 제50보병사단 사격장에서 유탄에 의해 살해당한 후 군부대에서 이를 은폐하였다는 가설'은 100%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황당한 가설이다.

 

 

 

여섯째, '개구리 소년'들을 다른 곳에서 앵벌이 등으로 이용하였다가 살해된 후 나중에 와룡산에 몰래 묻었다는 가설

 

이 가설은 첫 번째 경찰 측에서 추측한 가설의 연장선에 있는 가설이다. 그러나

 

그러나 개구리 소년들이 제3의 다른 장소로 납치되었거나, 다른 지역에서 앵벌이 등으로 활용되다가 살해된 후 시신 발견 장소로 옮겨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왜냐하면, 시신 발견 당시 모든 복장이 소년들이 실종 당시에 착용했던 복장 그대로였고, 경북대 법의학팀의 임상학적 소견에 따르면 사건 발생 당시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결론을 낸 상태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타 지역에서 살해한 후 시신을 옮기려면 자루나 큰 가방 등에 담아 옮겼어야 하는데, 당시 경찰과 국민 모두가 개구리 소년 사건으로 와룡산을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다른 안전한 지역이 아닌 와룡산을 다시 찾아 암매장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도 전혀 없다.

 

따라서 '개구리 소년'들을 다른 곳에서 앵벌이 등으로 이용하였다가 살해된 후 나중에 와룡산에 몰래 묻었다는 가설' 역시도 가능성이 희박한 가설이다.

 

 

 

 

지금까지 '개구리 소년 사건'과 관련되어 다양한 가설과 추리들을 합리성과 타당성을 기초로 재검토해보았다.

 

그 결과 여섯 가지 가설은 모두 그 가능성이 희박한 가설인 것으로 판단된다.

 

다음 제6편에서는 지금까지 제1~5편까지 과정을 거치면서 '제이슨 리 탐정사무소'에서 판단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가능성 높은 '추리 결과'를 공개하도록 할 것이며, 제7편은 그렇기에 이 장기 미제사건을 다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순서로 마무리를 하고자 한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지속적으로 제 글을 읽어주실 분들은 '구독하기'를 해주시면 새로운 글이 발행될 때마다 소식이 전해질 것이오니 이 점 참조 부탁드리는 바이다.

 

 

 

'장기 미제사건'을 반드시 해결하여 이 사회가 더 밝은 사회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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